난 유구하게 안경쟁이들을 싫어했다. 안경테에 걸쳐진 눈매 때문에 남들보다 표정을 읽기 힘들어서. 한 마디로, 속을 알 수 없어서 짜증 났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새끼도 마찬가지다. 피가 엉겨 흐릿한 시야 너머로 얇은 테에 걸쳐진 녹색 눈이 날 깔보는 듯했다. 개새끼. 니가 뭔데 그런 눈으로 날 봐?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우리가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은 데에는 장소의 탓도 있을지 모른다. 신들의 내기장에서 벌어지는, 단 한 명의 우승자를 위한 살인 게임. 서로 죽여야 하는데 사이가 좋을 수는 없지. 하지만 난 그런 거로 사람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원래 싫어한다. 그런데도 크게 티를 내지 않았던 건, 여기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어차피 난 이미 죽었고, 남들처럼 다시 살아나야 하는 엄청난 이유도 없다. 내가 죽든 남이 죽든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누굴 대놓고 싫어할 필요도 없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처음엔 오히려 나쁘지 않은 팀이었던 것 같다. 뭐, 멍청하게 내 말을 잘 들어주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날 깔보는 새끼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죽어도 무시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거든. 사실 그가 나를 실제로 깔봤는지는 알 수 없다. 딱히 물어본 적도 없고. 애초에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그렇게 느꼈다는 거다.
상대가 총을 들고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쏘는 대로 다 맞아줄 생각도 없고, 그깟 총알 좀 맞는다고 바로 죽지도 않는다. 급소에 맞으면 얘기가 다르긴 하겠지만 그런 건 제쳐두기로 하고. 어쨌든 내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 그는 총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손가락에 끼여진 너클이 부서지도록 힘을 주었다. 이번이 마지막이 되기를. 그게 나이든 너이든.
하지만 마지막 총성이 울렸을 때 웃는 건 나야.
격발음과 함께 쓰러진 건 내가 아니라 너였다. 당연한 일이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끝없는 고통에도 웃음이 났다. 그러길래 날 무시하지 말았어야지. 꼴 좋네, 마티아스 스턴버그. 우승이야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내가 이겨 먹긴 그른 싸움이다. 그냥 이러다 적당히 죽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의 소지품을 털었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구급상자를 본 순간, 순식간에 내 기분은 바닥을 쳤다. 이 씨발새끼. 끝까지 나를 무시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마 절대 날 위한 마지막 선물 같은 건 아닐 거다. 그런 걸 남길 만큼 사이가 각별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각별했으면 이따위로 싸우지도 않았겠지. 죽은 주제에 날 좆같게 하기는 이 새끼가 처음일 거다. 개같은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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