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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및 애프터로그

[연리] 다시 없을 충동



 BGM: Evelyn Stein - And The Flowers Were Gray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그때의 우리는 답지 않게 많이 지쳐있었다. 오래된 모범생 연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아직 오지도 않은 입시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단 하루만, 전부 던져버리고 떠나고 싶었다.


 충동.

 우리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


 토요일 늦은 오후, 우리는 그렇게 겨울 바다로 떠났다.


 마구잡이로 잡은 숙소는 생각보다 꽤 좋은 곳이었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바다도 나쁘지 않았다. 침대가 하나라는 사실만 제외한다면 모든 게 완벽했다. 하지만 걔랑 내가 무슨 일이 있겠어. 우리는 굳이 따지자면 사이가 나쁜 쪽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경쟁한 사이였으니까. 서로 앞다투어 1, 2등을 차지했고. 우리는 교내에서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경쟁자였다.

 공부면 공부, 체육이면 체육, 반장과 부반장, 학생회장과 부회장.

 이 모든 것을 무려 5년의 세월 동안 엎치락뒤치락 했으니 미운 정이라도 들었다면 들었을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긴 세월 동안, 늘 여유로워 보이는 그 얼굴이 한 번은 일그러지길 바랐다. 그러나 내가 1등을 한 날에도, 학생회장을 한 날에도, 체육대회에서 윤정연을 제치고 우승한 날에도, 걔의 얼굴은 항상 그대로였다. 이제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만도 한데,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울화가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한 고집 하는 성격이라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여행을 온 이유는....

 그저 그때의 우리가 충동적이었고 어려서서로에게 어떤 긍정적인 감정을 느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분명 그랬다.

 내가 잘못 알았을 리 없다.

 왜냐하면 난, 윤정연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한 대 치고 싶은 심정이었으니까. 그런 걸 호감이라고 표현하지는 않잖아?


 겨울의 바닷바람은 무자비했다. 짜디짠 냄새가 추위와 함께 코끝을 스치면, 드는 감상은 해방감보다는 허탈함에 가까웠다. 이렇게 추운데 괜히 개고생한 건가? 처음으로 잘못된 판단을 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건 나만의 잘못은 아니다. 지금 내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윤정연, 네 잘못도 있는 거지. 우린 공범이었다.


 우리는 바깥에 10분도 채 서 있지 않고 숙소로 돌아왔다. 들어와서 본 거울 속 우리의 코가 너무 새빨개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진짜 철부지 같은 모습이었어, 우리.


 짐을 정리하고 누우니 딱히 할 것도 없었다. 윤정연도 말없이 침대에 누웠다. 우리는 각자 침대의 끝에 걸치듯이 누워있었다. 꽤 붙어 다니기는 했지만 필요한 정보 외에는 실없는 소리나 가끔 하는 사이였기에(주로 윤정연이 내게 능글맞게 시비를 걸었던 게 전부지만)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이 오가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같은 침대에 누워도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드는구나. 새삼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 우리도 친구는 아니지. 그러니 맞는 말일지도 몰라. 원래 그런 걸 뜻하는 말은 아니지만.

 계속 한 자세로 있으니 불편함이 느껴져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자, 시야를 가득 채우는 등이 눈에 들어왔다. 쟤는 불편하지도 않나. 내가 신경 쓸 건 아니지. 시선을 거두고 손에 쥔 핸드폰을 보는 그때, 귓가에 이불의 마찰음이 들렸다. 불편하기는 했나 보지. 짧은 생각이 스쳤다.


 기분 탓인가?

 윤정연, 네가 날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서 확인해 보면 당연히 기분 탓이라는 듯 네 시선은 다른 곳에 쏠려있었다. 하지만 내가 너를 본 그 순간, 너도 나를 봤다.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가 말없이 눈을 마주한 적이 있었나? 사실 오래라고 말할 것도 없었다. 아마 3초에서 5초 내지의 시간이었을 테지. 그런데도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입술을 포갰다.

 우리를 겨울 바다로 불렀던 그 충동이 아직 가시질 않았던 걸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자꾸만 하게 되었던 그 날, 네 입술에서는 익숙하지 않은 맛이 났다. 갑작스러운 충동도, 살을 에는 바닷바람도, 눈앞의 너도, 입에서 느껴지는 맛도, 모든 게 낯설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날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우리는 서툴렀지만 능숙했고, 어색했지만 열정적이었다. 그러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니, 그때 생각이란 걸 하기는 했었나? 아마 아닐 거다. 생각이라는 걸 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 없다.


 눈을 번쩍 뜨고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30분이었다. 이르다면 이른 시각임에도 고등학교 2학년이 이 시간에 일어난다면 필시 지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겨울방학이었고, 주말에 놀러 온 거니까 별문제는 없었다. 문제라면 우리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는 거지. 사실 이러고 나면 무슨 감정이 들지도 모른다고, 열띤 숨을 뱉었던 그 순간에 잠시 걱정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스운 걱정이었다. 오히려 너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래도 되는 건가?


 "없었던 일로 하자."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갈무리하고 건넨 첫마디는 그거였다. 로맨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로맨틱한 사이가 아니었다. 너는 내 말에 웃으며 동의했다. 능청스러운 말을 한두 마디 덧붙였던 것도 같다. 기억은 잘 안 나네. 그런 네 여유로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도 네가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리라고 지레짐작했다.


 우리는 너무 비슷했다. 너무, 많이.


 그 겨울 여행 이후 우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네 표정이 일그러지기를 바랐다. 우리가 함께 보낸 그 밤, 네가 지었던 그 표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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