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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 및 애프터로그

[주아메] 애상


BGM ♬ : Acoustic Cafe - Pavane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니 금방이라도 눈이 올 것 같아 보였다. 벌써 겨울이구나. 유난히 더웠던 올해 가을, 나는 당신을 길에서 만났다. 그날 당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어떻게 잊을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수많은 기억이 파도처럼 덮쳐왔다. 아, 그랬었지. 나는 당신을 알고 있다.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얼굴. 지금은 당장 고개만 돌려도 볼 수 있는 당신의 얼굴은, 오늘이 지나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


"아메스티세."


 당신의 손을 끌고 거실의 소파에 천천히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당신은 100일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이제는 이런 일도 없겠지. 나는 서서히 고개를 들어 당신을 바라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할 나만의 긴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신과 처음 대화했을 때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신기할 정도로 닮은 점이 많았죠. 인간을 싫어하고, 자신이 최우선이고, 모든 것의 중심에 오로지 자신만을 두는 태도.  제가 하루하루 당신에게 생존 보고를 했던 거, 기억하고 있어요? 처음엔 그저 제가 살아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하기 위한 용도였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듣고 있든 아니든 그때의 저한텐 상관없었던 거죠. 어차피 당신도 별생각 하고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요. 당신도 저한테 아무 관심이 없었으니까. 우리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게 참 당연한 건데, 그 사실이 어느 순간 너무 편하게 다가오더라고요."


 당신은 여느 때와 같은 눈으로 날 보며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웃음이 났다. 그래, 그는 이런 사람이지. 그래서 내가… …. 나는 손을 뻗어 당신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엔 이런 감정을 느끼는 저 자신이 되게 낯설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죠. 저는 언제나 자신만 중요했던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었거든요. 혈육은 그저 제가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지갑 같은 존재였고 나머지 인간관계는 전부 피상적인 관계뿐. 하지만 그땐 그런 게 좋았어요. 서로 신경 쓸 필요 없고, 원하는 것만 주고받을 수 있는 그런 관계. 편하잖아요? 누군가 마음에 들이면 힘들기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피차 좋은 게 좋은 거죠. 종종 저에게 더 깊은 관계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 그런 순간이 오면 전 가차 없이 다 버렸어요. 불필요한 감정이 섞인 관계, 귀찮고 무겁다고만 생각했으니까."


 당신도 내가 표현하는 것들이 귀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꽤 씁쓸했다. 아마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이런 감정을 느낄 일이 없었겠지. 당신을 만나고 나서야, 나는 내가 거절하고 밀쳐냈던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바보 같은데, 그땐 당신이 신이라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생각했어요. 진심으로요. 신이란 존재 자체가 인간과는 너무 달라서 제 있는 그대로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느끼는구나 하고. 그래서 너무 편했어요. 당신이나 다른 신들은 인간들과는 달리 저를 보고 멋대로 기대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제가 당신이 신이기 때문에 사랑하게 됐다면… …. 당신이 모든 권능을 잃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었어야 했어요. 한낱 필부가 된 당신을 보고, 제가 행복함을 느낄 이유가 없죠. 하지만 전 그때 당신을 보고 정말로, 행복했어요. 나는 그저 당신이라서 사랑했었다는 걸 그제야. … …우습죠? 이런 인간이어도 사랑은 할 수 있네요. 영영 못 할 줄 알았는데."


 사랑이라는 거,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랑은 상관없는 거라고 여겼으니까. 정말 사람 일은 모르는 건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들어 당신의 눈을 마주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라진, 나를 보는 당신의 눈. 아, 이런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당신이 인간계로 내려온 후 저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절 기다리는 당신이 있는 집으로 향하는 것도, 고요한 집 안에서 당신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담백하게 들려오는 것도, 당신과 같은 침대에서 맞이했던 밤과 아침도. 모든 게 처음이었고, 처음으로 진짜 행복이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꽤 진부한 말인가요? 하지만 진부한 것은 언제나 가장 와닿죠. 그리고 저한테는, 당신과 함께함으로써 얻는 진부함이라면 그것조차 좋으니까. 사실은 저, 저보다 약한 사람을 사랑하기 싫었어요. 사랑한다는 것이 약점이 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사랑하게 된다면 저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을 사랑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들의 내기에서 당신에게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는데. … …아니었던 거죠. 그냥 당신이어서 그랬던 거야. 제가 그걸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지금과는 달랐을까요? 당신이 인간이 되기 전부터 그걸 알았다면. 그랬다면… …."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안다. 알기에 놓아주려고 했다. 그런 건 내 방식이 아닌데도, 당신은 내가 아니니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이 신이 되기 위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서글펐다. 내가 당신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자신이 없다. 당신과 보낸 100일은 당신이 살아온 시간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고 금방이라도 잊힐 수 있으니까. 막상 떠나가려는 당신을 보니 안 될 일이라 해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정말로 이게 마지막이라면. 이제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면. 당신의 대답이 어떻든 간에 이 말을 끝으로 다시는,


"아메스티세, 가지 말아요. 신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처럼 제 곁에 있어 주면 안 돼요?"


당신을 떠올리지 않을래요.




애상(哀傷) [명사]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함.

애상(愛想) [명사]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에 애착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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